티스토리 뷰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마음의숲, 1판 1쇄
(294p)
달리기를 시작한 뒤로 나는 어쨌든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위대한 일을 하든, 변변찮은 일을 하든 시간은 흘러간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과연 내가 어떤 사람이 될가 궁금했었다. 이 삶에 과연 인과관계가 있는 것인지, 만약에 있다면 지금 나는 무슨 일을 해야만 하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대신에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살아 본 바에 따르면 삶에는 인과관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아직까지 많은 경험을 해 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아직도 젊어서 그런지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까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인과관계란, 노력의 결과를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즉석복권과 같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그 보답이 즉각적으로 내게 찾아온다. 서른 살이 넘으면서 나는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해 봤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면 먼 훗날 큰 보답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부록 같은 것이다. 진짜 최선을 다하면 그 순간 자신에 얻는 즐거움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즐거움이 얼마나 컸던지 지나가고 나면 그 순간들이 한없이 그립다. 내가 하는 행동과 말과 일을 통해서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지 보여 줄 수 있다는 것. 한없이 투명해진다는 것. 그 누구 앞에서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는다는 것. 내게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를 가져다준다고 해도 그처럼 살아갈 수 있었던 순간들과 바꿀 생각은 하나도 없다.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업과 윤회라는 것도 그렇게 이해한다. 지금 이순간에 몰두하지 않는 자는 유죄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히 몰두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같은 순간을 맞이해야만 할 것이다.
(288p)
그런 점에서 나는 피로란 심리학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식이요법을 하고 근력운동을 한다고 해서 피로를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35킬로미터 지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결승점에 들어갔을 때의 일뿐이다. 옛날에 있었던 일들, 앞으로 해야 할 일들, 약간의 후회, 몇 번의 웃음, 문득 떠오르는 사람 같은 것들은 모두 35킬로미터 이전에서 일어난다. 벽을 만나고 나면 오직 결승점을 생각한 사람만이 결승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가장 힘든 순간에 희망을 꿈꾸는 일이다. 러너에게 피로란 휴식에서 몇 킬로미터 못 미친 상태를 뜻한다. 피로는 결국 휴식이 될 것이며 절망은 곧 희망으로 바뀔 것이다.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믿지 않을 수 없다.
(285p)
에밀 자토펙은 "아픔과 고통의 경계선을 넘어서면서 어른들은 아이들과 헤어진다. It's at the borders of pain and suffering that the men are separated from the boys"고 말했다. 성차별적인 발언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는 이 말을 "경계선에서 아픔과 고통을 받아들일 때, 소년은 남자가 된다"고 옮기고 싶다. 흔쾌히 고통과 아픔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완주할 때마다 나는 고통과 아픔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 고통과 아픔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가지의 삶에서 겪은 고통과 아픔 역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건 바로 그때다. 누구라도 35킬로미터 지점까지만 가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267p)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을 썼다. 소설 얘기는 하지 않고 건방지다거나 세상에 너무 화를 내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간신히 소설에 대한 얘기를 들어 보면 상당히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도무지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다거나 재미없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듣고 돌아온 날이면 언제나 잠을 설쳤다. 말하자면 나는 비가 내릴 때마다 젖는 사람이었고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지는 사람이었다. 소설을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 마음은 너무나 쉽게 허물어졌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도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마치 사랑하는 여자와는 결혼하지 못하는 소심한 남자처럼.
(263p)
내게는 달리기가 수행이다. 우선 언덕이 하나 필요하다. 한 30미터 정도 되는 언덕이면 제일 좋겠다. 처음 그 언덕을 단숨에 뛰어오를 때의 느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숙명이란 여자대학교의 교명이 아닌가는 생각이 들 정도다. 걸어서 내려가 다시 단숨에 뛰어오른다. 이런 과정을 10번 정도 되풀이한다. 그러면 조금씩 숙명에는 다른 뜻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점점
횟수가 많아지면서 언덕 오르기는 성스러운 종교적 체험에 가까워진다. 쉼 없이 돌을 굴리던 시지푸스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던
예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언덕에서 나는 인간의 숙명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게 된다. 내가 누구냐면 말이다, 가만히 두면 자꾸만
아래로만 내려가려는 존재다. 언덕 오르기는 내게 주어진 이 숙명을 거슬러 나를 조금 위쪽으로 옮겨 놓는 일이다. 정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15회 정도가 넘어서면 언덕을 오르는 내 온몸으로는 고통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숨은 금방이라도 막힐 것만 같고 심장은 그 자리에서 터져 버릴 것만 같고 허벅지와 종아리는 그대로 갈라질 것만
같다. 그 지경에 이르면 숙명은 여자대학교의 교명이라는 따위의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온몸을 움직여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중력의 영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면서도, 동시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발을
굴린다.
그다음에는 완벽한 고통이 찾아온다. 그대부터 나는 언덕 오르기를 수행한다. 온몸을 사로잡는 고통이
찾아오고 잠시 그 고통이 사라졌다가 다시 고통이 찾아온다. 언덕은 사라지고 파도처럼 되풀이해서 왔다가 사라지는 고통만이
느껴진다. 그 고통을 경험해 보면 그 안에 말로 잘 설명하지 못할 감미로움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주자들이 결승점
앞에서 느기는 고통, 그리고 그 안의 감미로움과 대단히 흡사하다. 그걸 경험한 다음에야 달리기를 그만둔다는 건 있을 수가 없다.
(251p)
한국에 돌아와 나는 한동안 신지 않던 나이키 러닝화를 꺼냈다. 첫날 나는 10킬로미터를 달렸다. 오랜만에 달리는 것이라 힘들었다. 1킬로미터를 달리는 데 걸린 시간이 6분 정도였다. 힘도 들었고, 숨도 찼다. 하지만 나는 다시 몸으로 이 세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달리기를 하는 이유는 절명과 좌절, 두려움과 공포가 거기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다. 거기에는 오직 길과 바람과 햇살과, 그리고 심장과 근육과 호흡뿐이다. 터널에서 빠져나와 나는 다시 땀과 거친 숨결의 세계로 귀환한 것이다. 한 달에 200킬로미터 이상을 달리는 대신에 숙면을 보장하는 단순한 삶이 나를 환영했다.
(244p)
일본에서 신사에 들렀을 때, 일본인 친구의 권유로 재미 삼아 소원을 빌었다. 주택가 옆 작은 신사를 빠져나오는데 일본인 친구가
무슨 소원을 빌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더 많은 일들이 내게 일어나기를, 그리고 그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고 대답했다. 예컨대 어떤 일이냐고 그 친구가 내게 물었다. 말하자면 예측할 수 없이 변하는 날시처럼, 늘 살아서
뛰어다니는 짐승들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처럼, 그처럼 단 한순간도 내가 아는 나로 살아가지 않기를,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나를 사로잡는 것들이 있으면 그 언제라도 편안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231p)
아람누리도서관에 갈 때마다
나는 그 길을 걷는다. 산길을 나만의 정원이라고 생각했듯이 나는 아람누리 도서관을 내 서재라고 상상한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던
지난겨울에는 그 서재에서 추위를 피해 가면서 잘 지냈다.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있으면 입고 있는 스웨터가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그보다 더 좋은 피한지가 없었다. 물론 여름이 되면 아람누리도서관은 좋은 피서지가 된다. 아람누리도서관에서는 한가롭게
서가 사이를 오가면서 흥미가 가는 대로 이런저런 책을 꺼내서 읽는 일이 많다. 아무런 계획 없이 책을 읽기 때문에
아람누리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일은 발견 행위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발견의 독서를 위해 되도록 아는 저자의 책이나 명저라고 일컫는
책들은 빌리지 않았다.
(228p)
"뉴잉글랜드의 기후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다. 거친 날씨와 찌는 듯이 무더운 날씨, 흐릿한 날시, 얼음 벌판에 빛이 반사되어 비치는 듯한 누르스름한 날씨가 있으면, 또한 화창하게 맑은 날씨, 덥지도 춥지도 않은 완벽한 날씨도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나는 이걸 써먹어
본다. 30대 후반은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시절이다. 끝없이 일어나는 일들과 당장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은 욕망, 암울하고 불안한
앞날, 외로움에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퇴근길의 나날이 있으면, 또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밤들, 내일의 일들이
기대되는 완벽한 나날도 있다. 아, 그렇구나. 훌륭하다는 말의 참된 의미는 그런 것이었구나. 그러므로 지금 달리지 않고 이렇게
누워서 빈둥대는 나 역시 훌륭한 러너의 하나로구나.
(220p)
매일 1시간씩 달리게 되면 인생을 압축적으로 맛보게 된다. 1시간 동안의 달리기는 간단하게 구성돼 있다. 부담을 안고 슬슬 달리기 시작한다. 한동안은 그 속도에 몸을 적응시킨다. 그다음에는 달리기를 즐긴다.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런 몸의 변화에 맞춰 나의 생각도 바뀐다. '아휴, 또 달려야만 하는 것일까? 정말 달리길 잘했군. 아아아, 너무 힘들어. 오늘은 여기서 그만 뛸까? 결국 끝까지 왔군. 달리기를 정말 잘 했어.' 달리기를 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는 순간순간 조금 전의 자신을 배반하는 생각들이 오간다. 1시간 동안, 나는 수많은 '나'로 분리됐다가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온다.
(206p)
인생의 일들은 언제나 짐작과는 다르다. 하물며 계획대로 이뤄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계획할 때의 우리는 '갑'의
입장이다. 스킨스쿠버도 배우고, 이탈리아에도 가고…… 못 하겠다는 말은 게으름뱅이들의 사전에나 존재한다는 듯이 의욕에 차서 계획을
작성한다. 우리 인생에도 무자비한 사주가 있다면, 그건 계획을 세울 때의 '나', 즉 '갑의 나'다. 그러나 막상 실천할 때가
되면, 우리는 '을'의 처지가 되어 갖은 푸념을 다 늘어놓는다. 왜 그 일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수천 가지도 더 댈 수
있다.
GTD라는 건 그런 '을'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자는 취지에서 나온 시간관리법이다. 'Get Things Done'의 준말인데, 우리말로 의역하자면 '일단 끝내기'가 되겠다. 목표고 계획이고 다 필요없고, 일단 끝내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취지에서 비롯했다. 만약 단번에 끝낼 수 없다면(즉 '을의 나'가 갖은 핑계를 늘어놓는다면) 일을 잘게 쪼개서라도 시작한 일은 끝낸다. 정 안 되면 손가락만 까딱해도 할 수 있는 일, 예컨대 물 한 잔 마시기 같은 것부터 시작한다. '을의 나'를 잘 설득해서 아주 작은 일이라도 끝내는 습관을 들이면 나중에는 제 버릇 못버리고 어마어마한 일들(적어도 세계일주 정도는 되어야만 한다)도 기어이 끝내고야 만다는 이론이 바탕에 깔려 있다.
달리기는 이 이론에 가장 부합하는 운동이다. 말하자면 'Get Running Done', 즉 '일단 끝까지 달리기'가 가장 중요하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끝까지 달려야만 한다. 중간에 포기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만약 포기할 것 같으면 계획을 수정한다. 5분 달리기. 이것도 힘들 것 같으면 5분 걷기부터 시작한다. 어떤 계획이든, 이작한 것은 반드시 끝낸다. 그런에 습관을 들이다 보면 역시 나중에는 제 버릇 못 버리고 일단 뛰기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42.195킬로미터도 기어이 와주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매일 뛰다 보니까 풀코스 완주하게 됐더라는 말은 정확한 설명이다. 장거리 마라톤은 장거리를 달리는 운동이 아니라 장시간 달리기, 즉 오랫동안 달리는 습관을 연습하는 운동이다.
(200p)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192p)
내가 바로 그 경우였다. 나는 빵집 아들로 태어났다. 이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달력의 빨간 날이란
그간 못 벌었던 돈을 일시에 벌어들이는 날이라는 걸 깨달아야만 했다. 예수님이 오셨든 부처님이 오셨든, 어린이를 위한 날이든
어버이를 위한 날이든 그때 돈을 벌지 못하면 한동안 어머니에게 손을 벌리 때마다 지청구를 들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잽싸게
알아차렸다. 그런 까닭에 내 유전자에는 벌 수 있을 때, 돈을 벌어 놓아야만 뒷날이 편하다는 생각이 가훈처럼 새겨져 있다. 매일
저녁 9시면 일수 아줌마가 들고 손바닥만한 푸른 노트에 어머니가 도장을 찍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그때마다 죽을 때까지 그 가훈을
지키지 않으면 삶이 상당히 피폐해진다는 사실이 은연중 내 머릿속에 각인됐다.
(181p)
시험을 다 치르고 다른 수험생들과 함께 전철역을 향해 걸어가는데, 이제 뭘 하고 싶냐고 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사고 싶은 책이 있으니까 종로서적으로 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지하철을 갈아타고 종로서적까지 갔다. 거기서 나는 또 한참 동안 책을 골랐다.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버지에게 이번 시험은 떨어진 게 틀림없으니까 면접 보지 말고 그냥 내려가자고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꾹 참고 책을 골랐다. 그날 무슨 책을 골랐는지 모르겠다. 무슨 책을 골랐는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종로서적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날 저녁에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아버지는 늙으셨고, 아마도 저 녀석이 나중에 소설가가 되려고 시험 친 날에도 책을 사러 간 모양이라고 회상할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종로서적이 거기 남아 있다면, 늙으신 아버지와 함게 가서 책을 골라 볼텐데. 그러면서 그게 아니라, 소설가가 되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위로받고 싶어서 거기로 간 것이라고 털어 놓을 텐데.
(160p)
내가 사 온 보석바를 보더니 친구도 "어, 보석바가 아직도 나오네"라며 반색했다. 사실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만나서 지금가지도 심심찮게 만나는 친구였다. 둘이서 어렸을 때 먹었던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한참 떠들었다. 물론 보석바를 먹던 시절의 이야기도. 그때 나는 깨달았다. 추억을 만드는 데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요즘 들어서 자꾸만 다른 사람들과 함게 보내는 시간들이 점점 더 소중해지는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물론 우리는 언젠가 헤어질 것이다. 영영. 누군가 우리 곁을 떠나고 난 뒤에 우리가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 기댈 곳은 오직 추억뿐이다. 추억으로 우리는 죽음과 맞설 수도 있다. 그때 그러고 보면 박경리 선생의 상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분의 어떤 일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혼자서 고독하게 뭔가를 해내는 일은 멋지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결국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153p)
어쨌거나,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좀 달라지는데, 요즘 나도 이 한계를 사랑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죽어도 좋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한 번 살더라도 제대로 살아 보기 위해서랄까. 예를 들어 주머니에 3만원만 넣은 채 서점에 가 보자. 그리고 서점에서 정말 읽고 싶은 책을 구입해 보라. 기준점은 1만 5천 원이다. 예를 들어 <긴 여름의 끝>과 <가능세계의 철학>은 둘 다 1만 8천 원이니 이 두 권 중에서는 하나만 고를 수밖에 없다. 2만 5천원짜리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을 산다면, 다른 한 권을 사기가 좀 힘들어진다. 5천 원으로는 시사주간지나 하나 살 수 있을까? 상한이 정해져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계속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게 최선일까? 나는 정말 이걸 원하나?
(148p)
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리는 눈이 아니라 쌓인 눈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어른이 되는 듯하다. 내리는 눈이 아름다운 줄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쌓이고 났을 때, 일어나는 일도 잘 알고 있다. 눈이 내린다고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게 바로 어른들의 사고방식이다. 열흘 붉은 꽃은 없다는 생각. 그래서 우리는 매달 보험료를 지불하고, 아이들을 더 많은 학원에 보내고, 여윳돈이 생기면 부동산을 구입하는 것이다. 앞으로 찾아올 힘든 시절을 좀 덜 힘들게 살기 위해서 지금의 행복을 보험금으로 지불한다. 굴곡 있는 인생보다 평탄한 인생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눈이 내리는 걸 보면서 "이렇게 눈이 내리면 달리기를 할 수 없잖아"라고 투덜댔다. 투덜대는 내 옆에서 딸아이가 껑충껑충 방 안을 뛰어다니면서 소리쳤다.
"오늘은 행운의 날이야."
"왜?"
"눈이 오잖아!"
눈이 내리면 그날이 행운의 날이 되는 건가? 언제 그런 법이 생겼나? 그럼 눈이 내리지 않는 날은 불행의 날인가? 그런 한심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가는가 싶더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맞아, 오늘은 행운의 날이야. 눈이 오니까. 다음 날 생각은 그만두고 이 행운이나 만끽하자.' 달리기를 할 수 있다면, 그것도 행운의 날이고, 눈이 내린다면 그것도 행운의 날이고, 하루 종일 누워서 잠만 잘 수 있다면 그것도 행운의 날이다.
달리기에서 스트레스란 실제적인 것이다. 숨이 차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든가, 무릎이 아파서 달리 수 없다든가, 힘이 다 빠져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지고 싶을 때 스트레스가 생긴다. 그 스트레스는 당장 달리기를 멈추거나, 오랜 기간에 걸쳐서 연습을 하면 사라진다. 실제적인 것이니까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일 아침에 일어나 달릴 일을 생각해서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게 될 때 받는 스트레스는 원래 없는 스트레스다. 그래서 그런 스트레스는 결코 없앨 수도 없다. 원래 없는 걸 어떻게 없애나?
생각만 고쳐먹으면 그런 스트레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여기 독일의 혁명가였던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7년 언니에게 쓴 편지가 있다.
"내가 지금 어디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 알아? 정원에 작은 식탁을 갖다 놓고 푸른 숲 속에 앉아 있어. 오른쪽에는 정향 냄새를 풍기는 노란 까치밥나무, 왼쪽에는 쥐똥나무 덤불, 앞쪽엔 진지하고 피곤에 지친 키 큰 은백양이 천천히 하얀 잎을 흔들고 있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행복한지. 벌써 성요한절 분위기가 느껴지네. 울창한 여른과 생명의 도취가 느껴져."
이 편지를 쓸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수감 생활 2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녀에게 감옥의 참담한 환경, 권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고립감, 협고한 공간, 갇힌 처지, 열악한 식사 같은 건 문제가 되지 못했다. 뒤이어 그녀는 "난 늘 기쁨의 도취 속에서 살고 있어,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말이야"라고 썼다.
행복과 기쁨은 이 순간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즉각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행복과 기쁨이란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겨울에 눈이 내린다면, 그날은 행운의 날이다. 내일의 달리기 따위는 잊어버리고 떨어지는 눈이나 실컷 맞도록 하자.
(140p)
이제 이 글을 다시 읽어 보면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리라. 그게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그렇다면 뭘 생각하고, 뭘 할까? 그건 정말이지, 내 자원을 모두 쏟을 가치도 없는 것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이제 100살의 눈으로 그 고통을, 고독을, 절망을 노려보자. 해서 지금 내가 여기 이곳에 떨어졌다고, 오래도 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도라에몽이 나타나서 지금의 나이로 되돌려 주겠다고 말했다고 치자. 고통과 고독과 절망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살 만큼 살아서 우여곡절 끝에 100살로 죽는다. 그렇다면 지금 죽는다고 생각하자. 고통은, 고독은, 절명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여기에서 내 자원을 100퍼센트 점유하고 있는데. 지금 내가 더 많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가능한 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런데 문제는 지금이다.
그래서 어른들의 잔소리는 끊이지 않는 셈이다. 금방 답이 나온다. 중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더 많이 할 일들과 가능한 한 하지 않아야 하는 일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면 노트에 적어도 좋겠다. 과거로 돌아가서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우린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생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야기는 정말이지 근사하게 바뀐다. 이야기에 필요한 것들은 더욱 풍부해진다. 두 번째로 소설을 쓰게 되면 군더더기가 거의 사라진다. "다 쓰고 난 뒤에 한 번 더 쓰면 잘 쓸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소설을 잘 쓸 수 있느냐고 묻는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따위 글을 일기장에 쓰는 대신에 뭔가 다른 재미난 일을 할 게 분명하다. (군인들은 이 말을 무조건 믿어라! 진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웬걸, 그 18개월은 눈깜빡할 사이에 흘러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한 까닭은 방위병으로 복무해야만 하는 18개월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기장에 쓰고 있으니 인생이 밝아질 리가 없는 것이다. 군 복무를 하던 시절에 나는 일기장에다가 "나는 지금 내 인생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지나고 있다"고 쓴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두 번째로 달린다면 아마도 고통보다는 다른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고 관찰하고 경험할 것이다. 그걸 아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고통에게 끌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 더 달리면 그 정도로 집중해야만 하는 고통은 많지 않다는 걸, 사실 고통이란 내가 얼마나 많이 달렸는가를 알려 주는 신호에 불과하다는 걸 아게 된다. 고통은 우리의 자원을 완전히 점유하고서는 모든 게 소진될 때까지 빨아들인다. 고통이 생기면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해진다.
달리기의 고통이란 앞면은 거울이고 뒷면은 유리로 된 이중창 같은 것이라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달릴 때는 정말이지 죽을 것 같았는데, 달리고 나면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 매번 그렇다. 그럴 때면 늘 고통의 순간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놀란다. 마찬가지로 마라통대회에 참가해 결승점에 들어가서 어떻게 달렸는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냥 이 글을 쭉 읽으면 되니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겠다. 뭐, 그렇게 된 것인데, 여러분들에게도 오늘 글을 거꾸로 읽는 경험을 하게 해 드리겠다.
그렇다면 해 봤으니 이제 그만하자.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라서. 혼자 자문한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그러다가 아주 무념무상에 든다. 처음에는 골이 아프지만, 나중에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문장을 따라가게 된다. 이거 의외로 재미있다. 한 번도 읽지 않은 책을 골라서 맨 뒷 부분부터 거꾸로 읽었다. 한 번도 한 해 본 일이 뭐가 있을까, 궁리하다가 소설을 거꾸로 읽어 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나도 한때 비슷한 일을 해 본 적이 있었다.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 느끼는 거북함은 바로 그런 일에서 나오니까. 간밤의 술자리를 거꾸로 되돌려 보는 것. 간단한 아이디어지면, 그 뜻은 참으로 깊어 보였다. 눈 내린 날, 밤새 술을 마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의 풍경을 찍은 필름을 그래도 뒤로 돌려서 만든 예고편이었다. 최근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 '북촌 방향'의 예고편을 봤다. 이 글을 마지막 문장부터 한 문장씩 다시 거꾸로 읽어야만 뜻이 통한다는 걸 먼저 말해야겠다.
(138p)
그렇게 해서 나는 달리기는 몸을 만드는 운동이 아니라 마음을 만드는 운동이라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됐다고나 할까? 별다른 목표 없이 두 달 동안 설렁설렁 뛰고 나니 마음은 내가 한 일들에 집중하는 연습을 했다. 그 전까지 달릴 때 내 마음은 내가 하지 못한 일들에 집중했었다. 예컨대 나는 한 달에는 최소한 200킬로미터는 달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늘 200킬로미터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매일 운동하며 이 여름을 지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이다. 맥주를 마실 때도 그 생각을 한다. 아무리 거품을 삼켜도 배는 나오지 않으리라. 나는 여름 내내 달렸으니까. 이건 좀 멋지다.
마흔이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깨닫는다. 30대에는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어서 달렸다. 그런데 이제는 나 자신과 내 삶과 내가 한 일들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때까지 달린다. 그 사이게 족저근막염이라는 게 있다. 그러므로 내게 족저근막염이란 몸의 운동에서 마음의 운동으로 달리기를 재정립하게 만드는 발바닥의 특수한 상태라고나 할까. 왜 달리느냐에 대한 대합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이런 인생에 대한 창의적인 재해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심리 상태에 이르게 하는 사색적이고 긍정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126p)
어쨌든 시간만 지나면 누구나 늘어나는 나이가 아니라 그가 한 행동들로 그 사람을 구별짓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남들보다 몇 년 더 살았다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는 헤드폰을 끼고 배낭을 맨 채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가던 노인을 본 일이 있었다. 잘 타더라. 리스본에서는 젊은 연인들 옆에 혼자 앉아서 우아하게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백발의 할머니도 봤다. 오래 산 사람과 그보다 덜 산 사람이 서로 뒤엉켜 살아가되 오래 산사람은 덜 산 사람처럼 호기심이 많고, 덜 산 사람은 오래 산 사람처럼 사려 깊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음, 그렇다면 나는 더욱더 아저씨들을 피해 젊은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다녀야만 한다는 것인데, 이게 말이 되나, 안 되나. 말이 되는 안 되든, 아무튼.
(118p)
여행자란 어떤 사람인가? 일어난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모든 걸 아 다 아는 것처럼 넘겨짚고, 현지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여기는 사람이다. 우린 애당초 그렇게 생겨 먹었다. 내게 여행이란 나 역시 이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 이 태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은 여행지가 집처럼 느껴질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거기서 아예 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더 솔깃했다. "난 한국이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존재도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편안해지고 모두 행복해진다. 이 말의 의미를 쉽게 납득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 당장 짐을 꾸려서 낯선 곳으로 떠나면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면, 그건 우리에게 여행할 권리가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다들 자기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떠날 것을 권한다.
(98p)
그러므로 결론이 이상해지지만 여름에는 무조건 행복하게 지내도록 하자. 죽고 나서도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골치만 아프다. 원한 같은 건 일찌감치 풀어버리고, 영 못 풀겠으면 그냥 잊어버리자. 살인마가 될 생각은 더구나 하지 말자. 그건 너무 불쌍하다. 남들은 쌍쌍이 몰래 숨어서 사랑하느라 땀 흘리는데, 머슴도 아니고 전기톱이나 도끼 같은 거 들고 거 뭣 하는 짓이더냐? 날 더운데 일 좀 그만해라. 그럴 힘이 있으면 친구에게 연락해 가까운 호프집에서 생맥주라도 마시든가. 왜 귀신이 나오는 드라마나 공포영화는 꼭 여름에 봐야만 하는지 이젠 알겠지? 여름만이라도 힘쓰는 일 하지 말고 좀 놀면서 지내자, 그런 교훈을 얻기 위해서지. 혹시 원한이 있더라도 날이 좀 시원해지면 그때 갚도록 하고, 일단은 시원한 맥주라도 한 잔 마시자.
(91p)
칭커에는 엄연히 절차가 있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면 자리마다 냅킨이 꽂혀 있는데, 그중에 유난히 솟구친 냅킨이 놓인 자리가 있다. 멋모르고 그 자리에 앉았다가는 3층 높이의 접시 안에 든 요리 값을 다 내야만 한다. 그 자리는 칭커라는 말을 제일 먼저 꺼낸 사람이 앉아야만 한다.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칭커'란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그들이 "이러다간 배가 커지지 않을까"라고 걱정할 즈음에 "이제 그럼 주문을 해 볼까"라는 표정으로 요리와 술을 더 시킨 뒤, "많이 드셨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계산하는 행위를 뜻한다.
한국인으로서는 칭커하는 일이 상당히 어렵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는 입장에서는 남길 게 뻔한 음식을 더 시키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려움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칭커한 사람은 음식을 먹기 전에 건배를 청하는 게 상례다. 이때, 칭커한 사람은 온갖 미사여구와 고사성어를 다 동원해 그 자리의 의미를 설명한다. 건배를 청할 때,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중국인들은 수사학의 대가들이 아닐까는 의심이 든다. 그 자리에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남자들은 무조건 영웅호걸이고 여자들은 무조건 절세가인이다. 시절은 호시절이고 건배 한 번으로 우리는 금석맹약을 맺는다.
거기까지야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낯선 문화를 접하는 것이니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결국에는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에게 건배를 청하고 한마디 읊어야만 하는 것이다. 30년간 봉직한 직장을 그만두는 퇴임식이라거나 부모님의 칠순 잔치를 맞이해서 고마움의 말을 전하는 자리라면 나도 감개가 무량해져서 중얼중얼 온갖 미사여구를 다 동원하겠지만,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렇게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정도로만 말했다가는 분위기가 썰렁해질 수밖에 없다. 차라리 10층이 될지언정 남은 음식을 다 먹는 편이 낫지. 말주변이 없는 나로서는 여간 땀이 빠지는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떻게는 살아가게 된다. 처음에는 칭커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내가 어느새 그 맛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중국 요리와 술은 말할 것도 없고 건배를 청하는 일까지도 좋아하게 됐다. 요령은 간단하다. 그냥 믿어 버리는 거다. 지금은 호시절이고 모두 영웅호걸 절세가인이며 우리는 꽃보다 아름답게 만나게 됐다. 의심하지 말자. 남는 건 그걸 얼마나 더 세게 표현하느냐의 문제뿐이다. 그리하여 나 같은 눌변도 장장 5분에 걸쳐 그날의 만남이 얼마나 역사적인 의미를 지녔는지에 대해 떠들게 됐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얘기.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게 말하고 나면 진짜 그렇게 믿어 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먼저 입과 귀로 취한다. 그다음에는 마음이 취하게 된다. 중국 속담에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사람에 취했다"라는 게 있는데 그 뜻 그대로다. 평범한 술자리도 그렇게 해서 대단한 자리로 바뀌게 된다. 말이 모든 것을 바꾼다. 어쩌면 우리는 이 삶에 '칭커'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말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요령은 간단하다. 지금은 호시절이고 모두 영웅호걸 절세가인이며 우리는 꽃보다 아름답게 만나게 됐다. 의심하지 말자.
(47p)
국어사전에는 이미 '외롭게 말하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다. 한자로는 '獨語하다', 우리말로는 '혼잣말하다'이다. 이 단어는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뭔가를 계속 말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다. 하지만 아들이 귀를 기울이든 기울이지 않든 뭔가를 계속 말씀하시는 부모님을 떠올리면, 그분들은 독어하거나 혼잣말하시는 게 결코 아니다. 상대방에게 가 닿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쨌든 계속 얘기하는 것이다. 이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혼자서 중얼거리는 행위와는 구별되리라. 그러니 '그게 가 닿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계속되는 말아기'에 해당하는 단어를 따로 만드는 게 좋겠다. 내가 국어학자는 아니지만, 여기에 해당하는 단어를 '숨말하다'라고 짓고 싶다. '숨말하다'는 '숨쉬다'처럼 모든 사람에게 일생동안 총량이 정해진 말하기를 뜻한다. 이건 소통 이전의 생존 자체를 위한 말하기다. 식당에서 손을 들어 "여기 물냉면 2인분만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행위다. 어떤 숨말하기는 상대방에게 가 닿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진심으로 두 사람은 소통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숨말하기는 말하는 사람으로서는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말하는 말하기다. 그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언어들. 하지만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그건 개인적인 말들이어서 듣는 사람은, 설사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숨말하기는 혼잣말하기보다 훨씬 더 외롭다. 그건 어떤 심연 앞에서 말하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게 심연이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가까운 사이인데도 난 당신을 몰라요. 당신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요. 그러니 한 번 더 말해 주세요." 그 말에 당신이 한 번 더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한 번 더 말하고 내가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면, 관계는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그러니 우리 사이를 유지하는 건 막힘이 없는 소통이 아니라 그저 행위들, 말하는 행위, 그리고 듣는 행위들일지도 모른다.
(39p)
엉엉엉. 내 경험에 따르면 그럴 때 흘리는 눈물보다 가슴 아픈 눈물은 없었다. 그건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흘리는 눈물, 함께 있으면 너무나 좋을 게 뻔한 사람들과 헤어지기 때문에 흘리는 누물이다. 왜 이 삶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영원할 수 없을까? 어린 시절, 친척들로 집안이 북적대던 명절을 보낸 뒤, 며칠 동안 우울한 마음에 젖어 있던 나 역시 그런 의문을 느끼곤 했었다. 나는 아이를 달랬다.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떤 시간도 영원하지 않으며, 또한 행복한 날이 하루라면 외로운 날도 하루라는, 그런 식으로 이 우주는 공정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그걸 설명할 수 있을까? 나조차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살아오면서 나도 이 인생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여러 번 상처를 받았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을 한 번만 경험한다. 추억으로 그 순간을 여러 번 되새길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강렬함은 점점 줄어든다. 아무리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비디오로 촬영해도 한 번 지나간 뒤의 일들은 더 이상 내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이 삶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지금 이 순간에 경험하는 일을 배워야만 한다. 내 인생이 저마다 다른 나날들로 이뤄진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날마다 익혀야만 한다. 그럴 때, 내게 학교가 되는 건 숲이다. 숲에서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23p)
죽기 전에 내가 이런 소설을 다시 쓸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내게 무척 중요하다. 서른다섯 살에 쓴 소설을 읽노라면 다시는 그런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다. 그러므로 지금 쓰는 소설 역시 미래의 내가 다시 쓸 수 없는 소설이겠지.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소설을 쓰는 순간은 모두 최후의 순간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다시 그런 소설을 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써 볼 건 다 써 봐야만 한다. 힘들다고 더 이상 못 쓰겠다고 말하는 건, 타이페이를 갔더니 너무 더워서 호텔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내가 타이페이를 다시 방문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만 할까? 더위보다는 경험에 집중하게 되겠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지금 소설을 쓰는 일이다. 그리고 고통이 아니라 지금 소설을 쓰는 일에 몰입한다면 결국에는 소설을 완성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마치 짧은 여행이 끝나고 남쪽 나라의 뜨거운 도시를 떠날 시간이 결국 찾아오는 것처럼. 그때 우리는 짧은 행복을 누린다.
'읽은 것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 (0) | 2018.01.18 |
|---|---|
| 82년생 김지영 (0) | 2017.12.21 |
| 딸에 대하여 (0) | 2017.12.21 |
|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 (0) | 2017.12.21 |
| 여중생a와 아이들은 즐겁다 (0) | 2017.09.30 |
